저도 한때는 제가 자존감 높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이루고, 원하는 걸 못 가진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번아웃이 왔고, 그제야 제가 자존감의 한 측면만 채워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자존감은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자존감은 감정이 아니라 '생각'입니다
자존감(self-esteem)이란 단어를 들으면 많은 분들이 감정의 영역이라고 떠올립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다릅니다. 자존감은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사고 방식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인지(cognition), 즉 생각의 영역입니다. 여기서 인지란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정신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관점에서 자존감을 구성하는 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 자기효능감(self-efficacy): 내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능력에 대한 믿음
- 자기조절감(self-regulation): 내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다루며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감각
- 자기안정감(self-stability): 내가 안전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내면의 기반
저는 솔직히 말하면 첫 번째 자기효능감 하나만으로 자존감이 높다고 믿어왔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멧돼지처럼 돌진해서 원하는 것을 대부분 손에 넣었으니까요.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 축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무례한 말을 건넸을 때, 화가 났지만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이 먼저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 말을 결국 하지 못했고, 그 순간은 아직도 가끔 불쑥 떠오릅니다. 자기조절감이 흔들리면 이렇게 됩니다. 내 감정이 정당한지를 스스로 허락받아야만 하는 상태가 되는 거죠.
실제로 국내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자기효능감이 높아도 심리적 안녕감이 낮은 집단이 존재한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능력이 있어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결국 자기효능감이 충족되지 못하는 시기가 찾아오자 저는 바로 번아웃(burnout)에 빠졌습니다. 번아웃이란 장기간의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신체적·정서적·인지적 자원이 고갈된 상태를 말합니다. 나머지 두 축이 버텨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 개의 축이 서로 받쳐줘야 한다는 걸 그때서야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자기조절감과 자기안정감: 내가 부족했던 두 가지
제가 부족했던 부분은 자기조절감과 자기안정감이었습니다. 두 가지 축이 온전하지 않은데 나머지 한 가지, 자기효능감에만 기대 살아 왔던 것이죠.
두 번째 축인 자기조절감(Self-regulation)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조율하면서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을 의미합니다. 자기효능감이 '할 수 있다'의 영역이라면, 자기조절감은 '느끼고 싶다'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무례한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을 말하려는 순간, '내가 이걸 말해도 되나?', '이 정도 일에 화를 내는 게 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치고 들어왔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고, 그 못다 한 말은 지금도 가끔 저를 찾아와 괴롭힙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게 자존감이 낮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판단력을 낮게 보다 보니 감정마저 '내가 맞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를 자기 판단력의 왜곡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정답이 없는 게 감정의 세계인데, 그 감정에도 정답을 찾으려 하는 것이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걸 글로 정리하고 나서야 처음 알았으니까요.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모르겠어요" — 판단력에 대한 불신에서 나오는 표현
- "안 될 것 같아요" — 파국적 사고(catastrophizing)에서 비롯된 표현
- "이만큼 아파해도 되는 건가요?" — 감정의 기준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태도
이 세 가지 표현은 모두 자신의 내면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옵니다.
세 번째 축은 자기안정감(Self-security)입니다. 여기서 자기안정감이란 '나는 지금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감각을 말합니다. 외부 환경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가 위협받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심리적 토대입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가장 눈에 안 보이면서도 가장 치명적입니다. 자기효능감과 자기조절감이 어느 정도 채워져 있어도, 이 안정감이 흔들리면 전체가 불안해집니다. 늘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것 같다고 느꼈던 게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안정감이 낮으면 사소한 외부 자극에도 과하게 반응하게 되고, 이것이 쌓이면 자기혐오나 자기연민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자료에 따르면, 자존감과 심리적 안녕감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며, 자기안정감이 낮을수록 우울과 불안 증상의 발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출처: 한국건강증진개발원). 자존감의 세 가지 축이 서로 받쳐줘야만 단단한 자존감이 형성된다는 것, 제가 번아웃을 겪고 나서야 몸으로 확인한 사실입니다.
해결법: 감정 일기를 쓰는 습관 들이기
자존감 문제를 겪는 분들이 자주 쓰는 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안 될 것 같아요"입니다. 이른바 파국적 사고(catastrophizing)라고 부르는 패턴입니다. 파국적 사고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결과를 최악의 방향으로 단정 짓는 인지 왜곡을 의미합니다. 어떤 해결책을 제시받아도 "저는 어차피 안 될 것 같아요"로 마무리되는 대화가 반복되는 것이죠.
이 패턴의 바닥에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반복적인 실패 경험 이후 실제로 탈출 가능한 상황에서도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심리 현상입니다. 탈출구가 있어도 뛰어가지 않는 강아지처럼, 선택 자체를 포기하는 상태가 되는 거죠.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상태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기반의 감정 일기였습니다. 인지행동치료란 생각이 감정을 만들고, 감정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왜곡된 사고 패턴을 수정하는 심리 치료 기법입니다.
저는 릴스를 계속 넘기면서도 그날의 기분 나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경험을 자주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날의 감정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서였습니다. CBT 관점에서 감정 일기를 써보면 이렇게 됩니다.
- 오늘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적는다
- 그 사건이 어떤 생각을 만들었는지 적는다
- 그 생각이 어떤 감정을 불러왔는지 확인한다
- 그 감정에 따라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록한다
- 감정을 잘 표현하거나 조율한 부분이 있다면 스스로 칭찬한다
제가 이 방식으로 써보면서 가장 놀랐던 건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스스로를 칭찬하는 문장을 쓰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그 어색함 자체가 제 자기안정감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노션(Notion)에 무료 템플릿이 많으니 하루 5분이라도 감정 일기를 써보시길 권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정신건강을 단순히 질환의 부재가 아닌,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스트레스에 대처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상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출처: WHO). 자존감은 이 정의의 핵심에 있습니다.
자존감은 한 번 높이면 끝나는 수치가 아닙니다. 좋은 날도 있고, 카메라가 꺼진 혼자만의 시간에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다만 그 감정을 "모르겠다"로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씩 들여다보는 습관이 쌓이면 서서히 달라집니다. 저도 아직 가는 중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정신건강 상담이나 치료 조언이 아닙니다.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면 전문가 상담을 받아보시길 권합니다.